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유혹 앞에서 | 이성범 목사 | 2023-06-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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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무엘상24:4-7절 개역개정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왕이 타는 말을 특별한 방법으로 훈련합니다. 우선 혈통이나 조건이 월등히 뛰어난 말들을 선발합니다. 그렇게 추려진 몇십 마리의 말은 여러 훈련과 테스트를 거치는데, 마지막 훈련은 어떤 상황에서도 조련사가 호각을 불면 그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훈련까지 마친 말들은 사흘간 사막으로 보내집니다. 그 기간에는 물을 주지 않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거친 모래바람 아래 말들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매어 두고는 사흘째 되는 날, 오아시스 근처로 데려가 풀어줍니다. 그러면 멀리서부터 물 냄새를 맡은 말들이 오아시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합니다. 바로 그때 조련사가 호각을 붑니다. 말들은 사전에 호각 소리가 울리면 모든 행동을 멈추도록 훈련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훈련받은 대로 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말들은 고통스러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호각 소리를 듣고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자리에 즉시 멈춰서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왕을 섬기기에 합당한 말’이라는 표식의 낙인을 받고 왕궁으로 보내져 보마(寶馬)가 됩니다.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벌어진 골리앗과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화려한 등장이었지만, 시련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윗에게 쏠리기 시작하자 사울 왕은 불안을 느낍니다. 불안은 질투로 바뀌고, 질투는 살의로 번집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3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추격합니다.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다 엔게디에 숨어들게 됩니다. 엔게디는 사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아시스 지대로 가파른 절벽 위로 고원이 펼쳐진 곳입니다. 척박한 광야에 속하지만, 이곳만은 많은 물이 흘러 내려 많은 동물이 몰려들기도 합니다. 또한, 침식작용으로 인해 곳곳에 협곡과 자연동굴이 많이 발달해 있습니다. 이 엔게디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집니다. 다윗이 엔게디에 숨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사울이 3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도착한 것입니다. 엔게디가 살육의 현장으로 변할 수도 있는 이 긴박한 시간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울이 갑자기 배가 아프고 변의을 느낍니다. 용변 볼 자리를 찾다가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필 다윗이 숨어 있던 동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경호원도 없이, 칼도 내려놓고, 겉옷도 벗어 놓고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입니다. 이제 상황은 반전되고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의 생명이 도망자 다윗의 수중에 놓입니다. 그동안 다윗은 사울의 살해 위협 가운데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하며,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 왕이 제 발로 손아귀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간 사울에게 받은 학대를 곱씹으며 분노의 창을 한 번만 내리꽂으면 되는 것입니다. 숨 막히는 공포와 두려움, 외롭고 초라한 광야의 도피 생활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회하고, 본연의 삶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즉시 왕으로 추대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이 나와서 그에게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나이다. 다윗과 함께했던 사람들은 이 예상치 못한 반전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고, 다윗에게 허락된 절호의 기회라며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 말하듯 했습니다. 그들 역시 이 고통스러운 도피 생활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이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몹시 흥분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입니다”라고. 다윗도 오랫동안 동굴에 숨어서 탄원했었습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박해자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그를 따르던 군대와 함께 울부짖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박해자의 목숨이 다윗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기도의 응답이 아닙니까? 다윗이 이 상황을 명백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이치에도 맞고 개연성도 확실했습니다. 억울한 도피 생활을 이어가던 다윗의 무리가 이 상황을 ‘하나님의 뜻과 응답’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모두가 기회라고 말하는 상황을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보았습니다. 전혀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니 이것을 ‘유혹’으로 여겼습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유혹,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유혹’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윗은 멈추어 섰습니다. 기회를 놓칠세라, 일 초라도 빨리 칼을 휘둘러도 모자란 상황에 그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호각 소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눈앞의 상황을 기회로 여길 때 그는 그것이 유혹임을 감지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임을 감지했습니다. 다윗은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실 때, 내면의 들끓는 욕망과 주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즉시 멈추어 서서 주인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자아의 관성을 거스르고 주인의 호각 소리에만 반응했습니다. 이 멈춤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심을 증명했습니다. 다윗은 멈추기 위해 엄청난 저항을 거슬려야 했습니다. 단지 인생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을 하나님 주신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자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이 자기 사람들을 설득할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통렬하게 항변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여 지금 제정신이세요.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이게 지금 당신의 목숨만 달린 문제입니까?” 사람들은 다윗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사울을 죽이자고, 이 도피 생활을 끝내자고, 불의한 배교자를 처단하자고, 일대 다수로 격정적인 실랑이를 벌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윗은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현실의 압력을 거스르면서 자신과 자기 사람들을 멈추어 세웠습니다. 사울을 향해 금방이라도 날아들 것 같은 칼날과 창끝을 막아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호각 소리를 듣고 상황을 저울질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멈춰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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