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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이성범 목사 2017-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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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라디아서2:17-21절 개역한글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에서 죽은 다음 부활한 예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예수님의 부활만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되게 합니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부활 신앙에서 결정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활기가 있었는지도 부활 신앙의 선명성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부활 신앙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둘러싸고 이 천 년 동안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부활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부활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두 가지 방향에 집중됐습니다. 하나는 부활이 사실인가에 초점을 두어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고 의미만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연구 중에서 어느 하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떠한 해석을 하더라도 그 결과는 미덥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 의미뿐이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고전15:19)입니다. 부활절 예배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연중행사가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좌절하고 달아났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선포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존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부적이 아니라 그의 현존이며, 실존적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죽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입니다. 부활을 실존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은 공허한 의무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 신앙을 잃어버리고 죽은 예수님만을 회상하는 교회, 예수님의 유품만을 모아둔 기념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은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힘이며,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원초적인 희망의 근거입니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들어 있습니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고, 죽음을 알게 될 때 삶은 깊어집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만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있고서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5:24) 하지만 우리 고민 깊은 곳에는 언제나 자존심에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한 것보다 망했다고 소문나는 것 때문에 더 아프고, 아파도 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죽지 않은 자아가 있습니다. 이렇듯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 마음을 나 스스로 비우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의 은혜로만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에 의하면, 복음의 핵심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하는 것(Acceptance of the unacceptable)”입니다. 사랑 앞에 감복하는 순간 나는 없습니다. 엄청난 사랑 앞에서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품꾼의 하나로 받아주길 원했습니다. 가책 때문이었지만, 이것도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셨습니다. 아들을 보자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동네 사람들은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탕자가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 안에 탕자는 없습니다새롭게 태어난 아들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그의 사랑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오직 새로운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이 부활 생명으로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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