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신앙을 넘어서 | 이성범 | 2017-08-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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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5:17-20절 개역개정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도하시고 그 역사에 인간이 응답하는 신앙구조와 인간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하나님이 그 행위에 보상하는 신앙구조입니다. 전자는 은총 중심의 세계관으로 모든 관심이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잠깐 더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의 은혜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질병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특별한 은혜요, 실패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늘 감사로 살아갑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는 인본주의 세계관으로 모든 것을 보상으로 이해합니다. 내가 진실하게 사니까 복 받고, 내가 선한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내가 거룩하여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언제나 주어지는 보상에 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신앙은 마침내 자기 의에 빠지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원망합니다. 각자 마음에 정해놓은 선행이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일을 할 때는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때때로 오해도 받고 남이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선한 일을 꾸준히 행하다 보면 명예도 얻고, 실제로 선행에 축복도 따라서 모든 면에 복이 임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결과와 주어지는 보상에 대해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고 이것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선행하고 칭찬받는 것과 칭찬받기 위해 선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칭찬과 보상을 위해 선행하다 보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작고 인색하게 여겨지고, 사람들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무의식중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선행을 가장하게 되고, 자랑하며, 위선자가 되어 버립니다. 선행 자체를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남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위하여 마음을 쓰게 됩니다. 어느새 철저한 위선자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그러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사람들이었고, 동기도 좋았습니다. 남보다 더 깨끗하게, 성결하고 구별되게 살아보겠다는 결심으로 모였고, 또 그렇게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런데 점점 형식주의로 흘렀습니다. 진실을 떠나 허세에 빠지고, 마침내는 자기모순에 빠져들었고, 점점 심한 갈등과 위선이 체질화되면서 결국 자기 존재가 없어지고 타인 주도적인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형식뿐이요 내용이 없고, 외식뿐이요 진실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중시하며 살다 마침내 자기 윤리에 빠졌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과장하기에 이르렀고, 가르치기만 하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큰 책망을 듣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23:13).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어떤 신앙을 책망하십니까? 첫째는 형식주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와 금식, 선행하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모든 행동을 경계하십니다.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기에 예수님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6:17)하셨고. 또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외식주의에 빠지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받는 칭찬에는 관심을 두지 말 것입니다. 둘째는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신앙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도 사랑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 근본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셋째는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반성하고, 말하려거든 자신에게 먼저 하고, 가르치려거든 자신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자신은 잊어버리고 남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주의입니다. 자기자랑에 치우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교만으로 회개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구원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까지 믿음으로 살아온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남은 삶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긍휼, 오직 은혜로 살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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