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예배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가? | 이성범 목사 | 2019-12-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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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무엘하6:12-17절 개역개정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참된 예배는 우리의 필요나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예배가 무엇인지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목동이었고, 시인이자 음악가요 용사이자 왕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삼상13-14) 성경에서 이렇게 불린 사람은 다윗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이러한 총애를 받은 이유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아 추론할 수밖에 없지만, 본문을 읽다 보면, 그 이유가 다윗이 예배한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강화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일시켰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런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나서 언약궤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언약궤는 출애굽이 일어난 때부터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블레셋에게 한동안 전리품으로 빼앗겼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진압하자 먼저 언약궤를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으로 되돌려놓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오기 위해 바알라로 가서 곡식이나 동물을 한 번도 실은 적이 없는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대제사장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호위했습니다. 언약궤를 옮기는 일은 화려한 행렬이었고 축제였습니다. 음악가들이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연주했습니다. 춤추는 자들은 춤을 추었고,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를 불렀고, 사람들은 손뼉 치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다윗도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던 중, 행렬이 나곤의 타작마당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소들이 뛰는 바람에 수레가 기울어졌고 웃사는 신속한 행동으로 떨어지는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 그 순간, 웃사는 수레 곁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웃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행렬은 멈추었고, 축제는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나 가혹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단지 계획을 세워, 새 수레를 가져다가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기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축제 벌이며 즐거워하긴 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웃사가 죽었을까요? 언약궤를 수레에 싣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제사장들이 장대를 이용해서 들어 메야 했습니다. 수레에 싣는 것은 블레셋 방식이었습니다. 아마도 웃사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언약궤를 옮기는 것이 더 편리하고 효율적이고 세련되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이 훌륭하고 올바른 일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웃사가 죽자 다윗의 태도와 관점이 변화되었습니다. 눈앞에서 웃사의 죽음을 목격한 다윗은 더는 언약궤를 운반하고 싶지 않았고,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던 언약궤는 멈추어 석 달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이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라고 말하자 다윗은 다시 한번 언약궤를 옮겨오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제사장들과 연주자들, 노래하는 자들과 예배하는 자들이 참석한 것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손뼉 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행렬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삼하6:12-13) 이전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무엇이 달라졌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수레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제사장들이 장대를 이용해 언약궤를 짊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의 만족이나 레위인의 편리함, 사람들의 감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예배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예배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예배는 주님을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예배를 통하여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가 되려면,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얻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예배를 통하여 무엇을 얻으시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예배의 초점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나를 위한 예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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